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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 가가와 도요히코(かがわとよひこ) 목사

밸프 2024. 3. 13. 19:17

 

 

출생: 1888. 7. 10. 일본
사망: 1960. 4. 23.
 

일본의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그리스도교 전도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反戰)운동 혐의로 헌병대에 감금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시절에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다.

 
 

1. 성장기
1888년 7월 10일에 고베에서 해운업자 가가와 준이치와 도쿠시마 출신의 기생 스가오 가메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그의 부모가 연달아 사망하여 도쿠시마의 본가에서 아버지 정실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가가와는 도쿠시마중학교 재학 중에 1880년대 자유민권운동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기독교 사회주의에 공감하여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3월에 메이지학원 신학부 예과를 졸업한 그는 아이치 현의 각지에서 길거리 전도를 하다가 폐병으로 쓰러져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그는 같은 해 9월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가가와는 고베 시의 빈민굴로 이사하여 몇 번이나 중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신과 인간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1911년에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카와에서 전도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이 지역에 의무교육을 마치고 노동하는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실업보습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굴뚝 청소와 노동자를 위한 한 끼 식당인 ‘천국옥(天国屋)’을 개업하여 빈민구제 비용을 벌면서 상호부조를 통한 ‘사회악’과의 대결에 나섰다.


가가와의 이러한 실천에는 신학교 시대의 다양한 독서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저작에 나타난 무저항주의, 헨리 드라몬드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에서 보여준 기독교 박애의 실천 등을 들 수 있다. 메이지학원에 입학한 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게 된 그는 이를 꾸준히 읽었다. 가가와는 유물사관과 입장을 달리하였으나 『자본론』이 그의 사회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그는 오카야마고아원을 창설한 자선사업가 이시이 주지, 일본인 최초의 구세군 사관 야마무로 군베 등에게서도 감화를 받았다.


가가와는 신카와의 일요학교에 다니던 시바 하루와 결혼한 후, 1914년 프린스턴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 외에 심리학과 생물학을 전공하고 1917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직전에 여비를 벌기 위해 유타 주의 일본인회 서기로 취직한다. 거기서 그는 착취당하는 일본인 농부, 모르몬교 농부들과 소작인조합을 만들어 현지 지주와의 쟁의를 지도하였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신학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 사회운동가로서의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2. 활동
1917년 귀국 후 고베에서 무료 순회 진료와 예수단 여자우애회구제소 사업을 시작한다. 
그 후 노동조합운동에 의한 무산자 해방을 중시하여 스즈키 분지 등의 우애회에 가입하였다. 
1921년 고베 시의 가와사키, 미츠비시 양 조선소의 노동쟁의를 비롯한 다수 노동쟁의 제1선에서 활약하였다. 
사회소설 『사선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는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평생 합법주의 · 비폭력주의 투쟁을 기본으로 자주적인 공장관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투쟁 방법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투쟁이 패배로 끝나자 그는 노동운동 전선에서 물러났다.

가가와는 도시 노동자보다 농촌의 농민이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시 빈민굴 주민의 대다수가 농촌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농촌에 있을 때부터 이미 빈민이었다. 
그는 1920년 고베 시의 빈민굴을 방문한 스기야마 겐지로와 농민운동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스기야마는 동북학원신학교를 졸업한 후, 각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와 농업 기술 개량 지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토지를 갖지 못한 소작농민이 수확물의 절반가량을 소작료로 착취당하는 농촌의 실태를 목격한다.

1922년 4월, 고베에서 열린 일본농민조합 창립대회에는 각지의 농민운동가 약 120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스기야마가 초대 조합장으로 선출된다. 일본농민조합 창립을 통해 지방의 농민조합 설립과 통합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각지에서 소작쟁의가 급증하였다. 1926년 가가와는 무산농민소학교 교장으로 추천되었다.
1925년 보통선거법이 성립되자, 이듬해 3월 가가와는 오사카에서 결성된 노동농민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당이 분열된 후에는 몇몇 당의 고문을 맡았다. 이후 노동조합운동의 주류가 의회주의에서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의 대두로 조직이 분열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종교 활동에 집중하였다. 1929년 일본기독교연맹 산하의 ‘신의 나라운동’ 추진자로서 전국을 돌며 전도 활동을 하는 한편, 미국 · 유럽 · 필리핀 · 오스트레일리아 · 인도 · 중국 등으로 전도 강연을 다녔다.

가가와는 1940년에 반전론으로 시부야헌병대에 유치되었고, 그 후에도 관헌의 압박을 받았다. 그가 국제전쟁반대자동맹을 탈퇴한 것은 1943년이었으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협력적이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패전 후 성립된 황족 출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 참여(参与)에 임명되고, 귀족원 의원이 된다. 그러나 연합군총사령부가 전쟁 협력 의혹을 문제 삼아 승인을 유보하였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등원하지 못하였다. 이후 일본사회당 결성, 신일본건설그리스도운동, 세계연방운동 등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해외 전도 강연을 계속하였다. 1960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었으나, 4월 23일 도쿄 자택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저작
150권의 저서와 25권의 번역서를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그리스도교 입문』, 『빈민 심리 연구(貧民心理の研究)』 와 소설 『사선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 『한 알의 밀알(一粒の麦)』, 『소설 그리스도(小説キリスト)』, 그리고 시집 『눈물의 이등분(涙の二等分)』 등이 있다.